갑을 전세계약서

 

 

손바닥만 한 아파트를 전세 놓고 계약서를 보니

내가 '갑'이고 입주가가 '을'이라 적혀 있네

언제 내가 '갑'이었나 기억이 까마득해 온다

 

연애할 땐 내 비위 맞추던 남편이 '을'이고 내가 '갑'이었지만

결혼 후 어느샌가 까다로운 남편이 '갑'이 되어 버렸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아줌마 '을'로 변해 버린 나

 

자식들 태어나면서 목에 감고 나온 전생의 탯줄

이제 삭지 않는 동아줄로

네 목숨 옭아매고 있는 독과점 '갑'이 되었고

자식에게는 영원히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이 어미 운명

 

젊어서는 잡티 하나 없던 얼굴을 '갑'으로 알고 살았는데

어느새 아픈 허리가 내겐 '갑'이 되어 버렸구나

 

내가 사는 이승이 '갑' 저승이 '을'이었던 젊은 시간과 정산하고 나니

 

저승이 이승에게 빨리 '갑'에 도장 찍으라 채근해 댄다

도장없어 기다려요 기다리라고 둘러대니

지장이라도 괜찮단다 그냥, 콱 찍어 달란다, 내 원 참!